지상의 시간
-나태주
지상의 모든 시간은
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
기차도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
계절도 꽃도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
내 앞에 앉아서 웃고 있는 너도
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
어찌할 텐가?
더욱 열심히 살고
더욱 열심히 사랑할 밖에는
달리 길이 없다
능금나무 아래
-나태주
한 남자가 한 여자의 손을 잡았다
한 젊은 우주가 또 한 젊은
우주의 손을 잡은 것이다
한 여자가 한 남자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
한 젊은 우주가 또 한 젊은
우주의 어깨에 몸을 기댄 것이다
그것은 푸르른 5월 한낮
능금꽃 꽃등을 밝힌
능금나무 아래서였다
살아갈 이유
-나태주
너를 생각하면 화들짝
잠에서 깨어난다
힘이 솟는다
너를 생각하면 세상 살
용기가 생기고
하늘이 더욱 파랗게 보인다
너의 얼굴을 떠올리면
나의 가슴은 따뜻해지고
너의 목소리 떠올리면
나의 가슴은 즐거워진다
그래, 눈 한번 질끈 감고
하나님께 죄 한 번 짓자!
이것이 이 봄에 또 살아갈 이유다.
숲속에 그 나무 아래
-나태주
숲속에 그 나무 아래
우리들의 나뭇잎은 떨어져 있을 것이다.
떨어져 썩고 있을 것이다.
그날의 그 우리들의 숨소리, 발자국 소리,
익은 알밤이 되어 상수리나무 열매가 되어
썩은 나뭇잎 아래 싹을 틔우고 있을 것이다.
어차피 우리는 이승에서 남남인 걸요.
마음만 마주 뜨는 보름달일 뿐,
손끝 하나 닿을 수 없는
산드랗게 먼 하늘인 걸요.
안돼요 안돼요 안돼요 안돼요
한사코 흐느는 물소리 물소리.......
덤불 속으로 기어드는 저기 저 까투리 까투리......
숲속에 그 나무 아래
우리들의 나뭇잎은
떨어져 쌓여서 썩고 있을 것이다.
아름다운 우리의 또 다른 여름을
아름다운 우리의 또 다른 가을을 꿈꾸며.
저 혼자서 꿈꾸며.
봄맞이꽃
-나태주
봄이 와
다만 그저 봄이 와
파르르 떨고 있는
뽀오얀 봄맞이꽃
살아 있어 좋으냐?
그래, 나도 좋다.
전화선을 타고
-나태주
전화선을 타고
쌀 씻는 소리
설거지하는 달그락 소리
아, 오늘도 잘 사셨군요
전화선을 타고
텔레비전 소리
나직하게 들리는 음악소리
아, 오늘도 잘 쉬고 계시는군요
고맙습니다.
내가 좋아하는 사람
-나태주
내가 좋아하는 사람은
슬퍼할 일은 마땅히 슬퍼하고
괴로워할 일은 마땅히 괴로워하는 사람
남의 앞에 섰을 때
교만하지 않고
남의 뒤에 섰을 때
비굴하지 않은 사람
내가 좋아하는 사람은
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
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
그저 보통의 사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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